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 기억과 거짓의 가족 초상

by enjoykane 2025. 12. 15.

영화 &lt;파비안느에 관한 진실&gt; : 기억과 거짓의 가족 초상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 기억과 거짓의 가족 초상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The Truth, 2019)’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프랑스에서 연출한 작품으로,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와 그녀의 딸 ‘뤼미르’가 오랜 갈등 끝에 재회하며 드러나는 가족의 기억, 왜곡된 진실, 그리고 인간의 자존심을 섬세하게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는 ‘진실’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되는 과거와 감정의 균열을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카트린 드뇌브가 연기한 파비안느는 자기 자신을 신화처럼 믿는 배우이며, 쥘리에트 비노슈가 연기한 딸 뤼미르는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상처받아 온 인물입니다. 영화는 거대한 사건 대신, 대화와 시선, 침묵을 통해 가족 관계의 복잡함을 드러내며 “우리는 과연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화해보다 이해에 가까운 결말로, 가족이라는 관계가 가진 불완전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연대의 가능성을 깊은 여운으로 남기는 작품입니다.

줄거리 – 한 권의 회고록이 불러온 재회, 그리고 어긋난 기억들

영화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카트린 드뇌브)’가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하며 시작됩니다. 이 책은 그녀가 살아온 배우 인생과 명성,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삭제’와 ‘왜곡’이 섞여 있습니다.

이 회고록 출간을 계기로, 오랫동안 어머니와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딸 ‘뤼미르(쥘리에트 비노슈)’가 남편과 딸을 데리고 프랑스를 찾습니다. 뤼미르는 미국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살아가며 어머니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파비안느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입니다.

모녀의 재회는 따뜻함보다는 어색함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파비안느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정답’처럼 말합니다. 반면 뤼미르는 회고록 속에서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친구였던 배우 ‘사라’에 대한 이야기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합니다.

특히 사라의 존재는 영화에서 중요한 감정의 축을 이룹니다. 사라는 파비안느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고, 동시에 뤼미르에게는 더 따뜻한 어른이자 위로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파비안느의 회고록 속에서 사라는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파비안느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만 소비됩니다.

뤼미르는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하지만, 파비안느는 “그게 내가 기억하는 진실”이라고 맞섭니다. 이 대립은 단순한 모녀 싸움이 아니라, ‘기억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입니다.

한편 파비안느는 SF 영화에 출연 중입니다. 이 영화 속 설정—젊음을 유지한 채 우주를 떠돌다 늙어버린 딸을 만나는 어머니—는 파비안느와 뤼미르의 현실 관계를 은유적으로 비춥니다. 현실과 영화 속 역할이 겹쳐지며, 파비안느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영화는 큰 폭발이나 극적인 화해 없이, 일상의 대화와 침묵을 통해 모녀의 관계가 아주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완전한 이해도, 완벽한 용서도 아니지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조심스럽게 시작됩니다.

등장인물 – 진실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

1) 파비안느 – 진실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전설적인 배우
파비안느는 스스로를 신화처럼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녀에게 과거는 기록이 아니라 ‘연출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불편한 기억은 지우고, 자신을 빛내는 기억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악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그 또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강한 척해온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연기와 현실의 경계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진실은 언제나 ‘재구성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2) 뤼미르 – 기억을 되찾고 싶은 딸
뤼미르는 어머니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며 늘 비교당하고 외면받았다고 느껴온 인물입니다. 그녀에게 진실은 단순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인정받는 과정입니다.

뤼미르는 파비안느에게 분노하면서도, 어머니를 완전히 미워하지 못합니다. 그 복합적인 감정은 영화 전반에 걸쳐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됩니다.

 

3) 사라 – 부재로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사라는 영화에 직접적으로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파비안느가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라이벌이자, 뤼미르에게는 어머니보다 따뜻했던 어른이었습니다.

사라의 부재는 이 영화가 말하는 ‘기억의 불공정함’을 상징합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됩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대신, 인간이 어떻게 기억하고, 왜 왜곡하는지를 보여줍니다.

 

①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기억의 선택일 수 있다.
파비안느는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과거를 재구성합니다. 이 영화는 기억이 얼마나 주관적인지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② 가족 간의 상처는 말하지 않았을 때 더 깊어진다.
뤼미르가 원하는 것은 사과보다 인정입니다. “그때 너를 상처 입혔다”는 말 한마디가, 관계를 바꿀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③ 부모는 영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다.
파비안느는 위대한 배우이지만, 완벽한 어머니는 아닙니다. 영화는 부모 역시 두려움과 자존심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④ 이해는 화해보다 먼저 온다.
이 영화에는 명확한 화해 장면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작은 변화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현실적인 희망’입니다.

 

⑤ 말해지지 않은 진실도 관계를 구성한다.
사라의 존재처럼, 말해지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람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친 진실은 분명 존재합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대신 관객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진실은, 정말 모두의 진실인가요?”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오해와 침묵이 존재하는지를 담담히 보여주며, 완벽하지 않기에 더 현실적인 인간 관계의 초상을 오래도록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