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사울의 아들> : 지옥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을 붙잡는다는 것

by enjoykane 2025. 12. 28.

영화 &lt;사울의 아들&gt; : 지옥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을 붙잡는다는 것
영화 <사울의 아들> : 지옥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을 붙잡는다는 것

 

영화 ‘사울의 아들(Son of Saul, 2015)’은 헝가리 감독 네메시 라슬로가 연출한 홀로코스트 영화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로 강제 동원된 한 남자의 시선을 통해 절대적 비인간화의 현장을 전례 없이 밀착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역사 설명이나 감정적 음악으로 관객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대신, 카메라는 주인공 사울의 뒷모습과 얼굴 가까이에 붙어 수용소 내부의 공기, 소리, 혼란, 공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겪는’ 수준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사울은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한 소년을 발견하고,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 믿으며 제대로 된 매장을 해주겠다는 목표에 집착합니다. 이 집착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바로 그 비합리성이 인간성의 마지막 저항처럼 느껴집니다. 〈사울의 아들〉은 생존과 윤리, 죄책감과 구원, 집단의 비극 속에서 개인의 존엄이 어디까지 가능할지를 집요하게 묻는 작품입니다. 관객은 사건을 안전한 거리에서 관람하지 못하고, 끝내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줄거리 – ‘살아남기’가 아니라 ‘한 사람을 지키기’로 향하는 집착

영화의 배경은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주인공 사울 아우스랜더는 ‘존더코만도’로 일하고 있습니다. 존더코만도는 유대인 수감자들 중 일부를 강제로 선발해, 가스실로 끌려온 사람들의 마지막 과정을 처리하게 만드는 조직입니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속여 샤워장으로 안내하고, 가스가 살포된 뒤에는 시신을 옮기고, 금니를 뽑고, 옷과 소지품을 분류하며, 화장터로 보내는 일까지 수행합니다. 말 그대로 “죽음의 공장”이 돌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노동을 떠맡는 존재들입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어떤 설명도 길게 주지 않습니다. 대신 소음, 비명, 군홧발, 독일어 명령, 문이 닫히는 소리 같은 감각적인 요소로 그 장소의 실체를 체감하게 만듭니다. 사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끊어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무감각함은 잔인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방어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에게 일상은 ‘죽음 처리’이고, 내일은 언제든 자신들의 차례가 될 수 있습니다. 존더코만도의 운명은 대부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증거 인멸’이라는 이유로 처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가스실에서 기적처럼 잠시 살아남았던 한 소년이 발견됩니다. 소년은 곧 독일 군의 손에 살해되지만, 사울은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멈춰 서게 됩니다. 그는 아이를 ‘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관객은 그 말이 사실인지, 사울의 착각인지, 혹은 죄책감과 절망 속에서 만들어낸 자기 암시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순간 사울의 내면에서 ‘한 사람’이 다시 떠오른다는 점입니다.

사울은 그 아이의 시신을 화장터로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법에 따라 랍비를 찾아 장례 기도를 올리고, 땅에 묻어주려 합니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 시신 하나를 숨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동료들은 탈출과 봉기를 준비하고 있고, 모든 행동은 감시당합니다. 사울의 목표는 집단의 생존 계획과 충돌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 집착은 ‘살아남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성을 붙잡기 위한 비합리적 선택입니다.

영화의 긴장감은 단지 추격이나 폭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사울의 선택이 동료들에게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럼에도 누군가의 “죽음이 숫자”가 되는 순간에 “한 사람의 이름”을 되찾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면서 만들어집니다. 사울은 거대한 역사 속에서 지워진 개인을 다시 ‘한 사람’으로 복원하려 하며, 그 행위 자체가 이 지옥 같은 시스템에 대한 조용한 반항이 됩니다.

연출과 시선 – ‘설명’ 대신 ‘체험’으로 관객을 밀어넣는 방식

〈사울의 아들〉이 특별한 이유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방식이 기존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전쟁·역사 영화가 사건을 설명하고, 구조를 보여주고, 관객이 이해하도록 돕는 방향을 택한다면, 이 영화는 이해보다 ‘체감’을 선택합니다. 화면은 대부분 사울의 얼굴 근처 혹은 뒷모습을 따라가며, 주변의 참혹한 장면들은 초점 밖으로 밀려나 있거나, 흐릿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관객은 “보지 못해서 편안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기에 더 공포스러운” 상태에 놓입니다.

이 카메라의 밀착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처럼 느껴집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때로 폭력의 재현이 관객의 소비가 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반면 이 영화는 잔혹함을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고, 오히려 소리와 분위기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군인들의 고함, 금속 문이 닫히는 소리, 불길이 타오르는 굉음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신경을 파고듭니다. 그래서 관객은 ‘관람자’가 아니라 ‘수용소의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영화는 편집과 동선으로 혼란을 의도적으로 유지합니다. 수용소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사울은 그 안을 뛰고, 숨고, 이동합니다. 우리는 전체 지도를 알지 못한 채, 그가 지나가는 순간의 단서만으로 공간을 짐작하게 됩니다. 이는 수용소라는 장소가 본질적으로 인간을 방향 감각과 주체성을 잃게 만드는 구조임을 강조합니다. 어디서든 명령이 떨어지고, 언제든 죽음이 튀어나오며, 개인은 한 번에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배우의 연기 또한 과장되지 않습니다. 사울은 크게 울부짖지도, 영웅적으로 외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얼굴은 굳어 있고, 말수는 적으며, 눈빛은 무언가를 끝까지 붙잡는 듯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 절제는 관객을 더욱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의 분출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지 못하고, 끝까지 그 압박을 함께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주는 충격은 “잔혹한 장면”보다, “탈출구 없는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를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정리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이 인간을 지워버리는 시스템이 어떤 감각으로 작동했는지,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그리고 그 와중에도 무엇이 끝까지 남을 수 있는지에 집중합니다. 이 연출 방식은 관객에게 도덕적 거리두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그 시대는 특별했다”는 핑계로 안전하게 물러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 숫자가 된 죽음 속에서 ‘이름’을 되찾는 마지막 저항

〈사울의 아들〉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단단하고 무겁습니다. 이 영화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보다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존더코만도는 생존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처리해야 했던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이용당한 사람들이고, 그 사실은 그들에게 극심한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남깁니다. 영화는 이 모순을 단순한 ‘선악’으로 정리하지 않고,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또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① “장례”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의 시도입니다.
사울이 하려는 일은 단지 시신을 묻는 행위가 아닙니다. 수용소는 사람을 ‘이름 없는 숫자’로 만들고, 죽음조차 공정의 일부로 처리합니다. 그 속에서 장례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마지막 행위입니다. 누군가를 “시신”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순간, 시스템의 비인간성에 균열이 생깁니다. 사울은 그 균열을 만들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합니다.

 

② 진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붙잡을 이유’입니다.
소년이 실제로 사울의 아들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사울이 ‘아들’이라는 단어로 어떤 삶의 의미를 다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삶이 완전히 무너진 자리에서 그는 “나는 아직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가느다란 정체성을 붙잡습니다. 그 정체성은 죄책감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구원의 실마리이기도 합니다.

 

③ 집단의 전략과 개인의 윤리가 충돌할 때, 무엇이 옳은가를 묻습니다.
동료들은 봉기를 준비합니다. 그들에게는 타이밍과 비밀이 중요합니다. 사울의 행동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갈등합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데”라고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갈등 자체를 관객에게 돌려줍니다. 극한 상황에서 윤리는 사치인가, 아니면 마지막으로 붙잡아야 할 인간의 기준인가. 사울은 후자를 선택하고, 그 선택은 비합리적이지만 그래서 더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④ 악은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업무’처럼 작동합니다.
이 영화가 더욱 섬뜩한 이유는, 가해가 일상 업무처럼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명령, 절차, 관리, 처리. 폭력은 감정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굴러갑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사울의 아들〉은 이 ‘시스템화된 악’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보여주며, 관객에게 현대 사회의 무관심과 관성 역시 같은 구조를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⑤ 희망은 거대한 승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인정’에서 시작됩니다.
이 영화에는 통쾌한 승리나 명확한 구원이 없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실패하고, 무너지고,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끝까지 붙잡는 것은 “한 명의 인간을 인간으로 보내는 일”입니다. 관객은 그 작은 시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게 되지만, 영화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되는 지점에서, 가장 작은 인정이 가장 큰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사울의 아들〉은 관객을 울리기 위해 감정을 조작하지 않습니다. 대신, 숨 막히는 체험을 끝까지 견디게 하며 질문을 남깁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도, 당신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과거의 비극을 넘어 오늘의 삶에도 닿아 있습니다. 인간이 숫자와 효율로만 평가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을 대상화하고 스스로도 ‘기능’으로 축소되는지 경험합니다. 〈사울의 아들〉은 그 흐름에 맞서, 한 사람의 이름과 존엄을 되찾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필요한 선택인지 조용히 증명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