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Drive My Car)>는 일본 문학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상실’과 ‘침묵’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탐구한 감성적인 드라마입니다. 2021년 칸 영화제 각본상, 2022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이라는 세계적인 성과를 거두며, 일본 영화의 예술적 깊이와 섬세한 감정 표현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멜로도, 슬픈 인간극도 아닌,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는 작품입니다. 하마구치 감독 특유의 정적이고 관조적인 연출은 관객에게 마음속의 침묵을 들여다보게 하며, 인간이 어떻게 고통과 상실을 받아들이고 회복하는지를 철학적으로 묘사합니다.
줄거리 요약: 상실과 침묵을 넘어선 여정
연극 연출가 가후쿠 유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는 배우로서도 명성을 얻은 예술가지만, 아내 오토(기리시마 레이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깊은 상실감 속에 살아갑니다. 그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그것을 묻지 못했고, 오토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담은 녹음테이프를 반복해서 들으며 ‘대화하지 못한 시간’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의 자동차 — 붉은 사브(SAAB) 900 — 은 오토의 목소리와 함께 그에게 남은 마지막 기억의 공간입니다.
2년 뒤, 그는 히로시마 연극제의 초청을 받아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됩니다. 이 연극의 언어와 감정은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하며, 그는 자신의 상처를 예술로 녹여내려 합니다. 그러나 연극제 규정상 그는 직접 운전할 수 없게 되고, 대신 젊은 여성 운전기사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그의 운전을 맡습니다. 처음엔 서로의 존재에 거리를 두던 두 사람은, 긴 도로 위의 침묵 속에서 서서히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유스케는 오토에 대한 미련과 죄책감을, 미사키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상처와 자기혐오를 털어놓으며 서로의 고통을 공유합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홋카이도로 향하는 여정에서 각자의 ‘트라우마의 장소’를 마주하게 됩니다. 무너진 집터 앞에서 그들은 눈물 속에 서로를 위로하며, 삶의 무게를 함께 감당합니다. 영화는 그 순간을 통해 ‘상실의 끝’이 곧 ‘치유의 시작’ 임을 잔잔히 전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사키가 유스케의 차를 몰고 홀로 도로를 달리는 장면은,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주요 인물 분석: 고통을 감싸는 침묵의 관계들
1. 가후쿠 유스케 (니시지마 히데토시)
유스케는 상실을 연극으로 감추는 인물입니다. 그는 연출가이자 배우로서 타인의 감정을 연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감추고 살아갑니다. 아내의 불륜을 알면서도 침묵한 그는 ‘대화하지 못한 슬픔’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가 연극을 통해 타인의 언어를 빌려 자기 내면을 표현하려는 모습은 인간이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가 체호프의 대사 “살아가야 한다”라고 읊조리는 장면은, 상실을 견디며 나아가는 인간의 결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2. 미사키 (미우라 토코)
미사키는 어린 시절 학대받던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깊은 상처를 지닌 인물입니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며 ‘운전’이라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행위를 통해 삶을 버텨갑니다. 그러나 유스케와의 여정을 통해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게 되고, 그 침묵의 고백이 곧 ‘해방의 순간’이 됩니다. 미사키의 존재는 유스케의 구원자이자, 동시에 그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거울입니다.
3. 오토 (기리시마 레이카)
오토는 영화의 서사 속에서 육체적으로는 부재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모든 장면에 스며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유스케에게 사랑과 배신, 그리고 창작의 영감을 동시에 남깁니다. 특히 그녀가 남긴 ‘녹음된 목소리’는 유스케의 기억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하며,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감정의 잔향을 상징합니다.
4. 다카츠키 (오카다 마사키)
다카츠키는 유스케가 연출하는 연극의 젊은 배우이자, 생전에 오토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충동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으로, 유스케의 내면을 반사하는 또 다른 ‘분신’ 같은 존재로 등장합니다. 유스케가 그를 통해 오토의 비밀과 마주하는 과정은 곧 자신이 외면했던 진실과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다카츠키는 유스케가 억눌렀던 감정의 대리인이자, 과거를 직면하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합니다.
평가와 의미: 말 없는 감정의 파장을 전하는 걸작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일본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명작 반열에 올랐습니다. 평단은 이 영화를 “인간의 감정을 가장 조용히, 그러나 가장 깊이 파고든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영화는 침묵과 정적을 통해 말보다 강한 감정의 진동을 전달하며, 자동차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치유의 무대’로 활용합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도로 풍경은 인물들의 내면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대화보다는 침묵을 통해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연극과 영화, 언어와 침묵의 경계를 섬세하게 교차시키며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시각화했습니다. 특히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극 중 극으로 활용한 연출은,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한 장치입니다. 연극의 대사와 실제 인물의 심정이 겹쳐지는 순간, 영화는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초월하며 관객에게 감정적 몰입을 극대화합니다.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우라 토코의 절제된 연기는 감정의 표현보다 ‘감정의 여운’을 남기며, 인간이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해 가는 과정을 진실하게 그려냅니다. 음악과 촬영 역시 감정의 파장을 시각화하며, 긴 러닝타임(179분) 동안 단 한순간도 불필요한 장면 없이 관객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결국 <드라이브 마이 카>는마이카>는 상실과 고독, 그리고 용서와 회복의 여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하마구치는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그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이다”라는 철학을 조용히 전합니다. 이 작품은 화려한 사건 대신 ‘감정의 공명’을 통해 관객을 울리며, 슬픔을 품은 모든 이들에게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잔잔하지만 강렬한 위로를 건넵니다. 감성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서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드라이브 마이카>는 반드시 감상해야 할 현대 영화의 걸작입니다.